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박순경 이야기 (6) - 마무리

vincent
2002년 06월 03일 03시 53분 58초 1201 3

근 한 달 넘어 만에 마지막 편을 올립니다.
저도 기억이 가물하네요. --;;;

--------------------------------------------------------------------------------------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월동세기 뒤숭숭(가제)>이라는 노래를 외운 후 한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 전문가는 당시에 여느 집에선 가질 수 없었던 카셋트식 비디오 데크를 갖고 있었던 옆집의 허#라는 동갑내기였는데, 걔는 일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돌아오는 지 생일이면 우리들을 초대해서는 자막도 없는 일본만화 '우주손오공(한국에서도 예전에 방영했던 '오로라공주와 손오공')'을 틀어주고는 마지 자기는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에 이 참에 걔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걔는 내 노래를 듣더니 진지하게 한 번 더 불러보라고 요청했다. 까짓거 한 번 더 불렀다.
걔는 듣고나서 뭔가 생각하는 척 하더니 일본노래가 아니라 중국노래라서 자기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복잡하게 말해도 되는데 간단하게 말했다.
걔가 중국노래라고 하는 근거는 오로지 '왕왕' 같은 'ㅇ' 발음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딴엔 그럴 듯하게 들렸다. 생각해보니 "비단이 장수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썽~"과 비슷한 노래 같기도 했다.

일본 노래냐, 중국 노래냐, 국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영숙언니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차츰 잊혀져가고 있었고, 엄마의 의상실도 차츰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고 있었는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엄마는 영화로 치면 '이걸 엎어 말어'..이런걸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미련 때문에 결정을 내려야할 시간을 점점 미루고 있었고, 그 때문에 버는 돈 보다 많아진 쓰는 돈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미스공언니는 마침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곳이 있어서 그 곳으로 갈 준비를 했고, 영숙언니는 엄마의 소개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으나, 영숙언니를 받아주려는 곳이 있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관할 구역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도 어정쩡하게 친분을 유지해왔던 박순경과 미스공언니의 사이도 뭔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사이에 미스공언니는 나와 동생과의 작별을 준비하면서 한 번 더 자신의 집에 데려가서 '에그밀크'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때 그 맛은 참 쓸쓸했다. 눈물 없는 아이였던 나는 미스공언니와의 작별에 대한 서글픈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른 채 언니가 집으로 가자니 가고, 언니가 해주는 '에그밀크'를 묵묵히  먹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했다.
다시 나는 이런 고소한 맛을, 이런 적당한 온기를 품은 '에그밀크'를 마실 수 없으리라,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이별과 만남을 결정지을 수 없구나... 그런 것들이 쓸쓸했다.

엄마와 아빠는 박순경과 미스공언니를 위해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물론, 영숙언니는 아직 거취가 정해지지 않았기때문에 환송회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박순경과 미스공언니를 기어코 나란히 앉힌 아빠와 엄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재능'이 없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가 더 어떻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할지 답이 없자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돌파구로 생각하는 '괜히 뜬금없이 아이들 노래시키기'를 감행하셨다.
그런 일을 명절 때마다 겪던 나는 졸립다는 매우 적절한 핑계를 대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가곤 했었지만, 그 날은 미스공언니를 위해 한 곡조 뽑았다. 나의 애창곡, '은행잎'이었는데... 이 노래를 부르다 하마터면 울 뻔 했다.

  "가을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어져요.
   지난 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일어서서 노래를 부른 후 앉을 때 미스공언니의 얼굴을 슬쩍 봤는데 무척 감동한 눈치였다. 정말 적절한 선곡이었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는데, 영숙언니가 훌쩍거렸다. 아마 자기 동생들이 생각났던 것일게다. 기분 좋은 노래를 불러보라고... 이번에 동생 차례가 되었다.(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노래 부른 다음엔 꼭 누군가 분위기를 띄워야만 한다.)
평소 만화주제가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는 동생이 도대체 뭘 부를까 머리속으로 헤아려보고 있었는데, 발딱 일어난 동생이 어느틈에 시작한 노래가 들려왔다.

  "월동세기 뒤숭숭 왕왕중제기~~"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바로 문제의 그 노래, <월동세기 뒤숭숭(가제)>이 아닌가. 일본 노래였다가 중국 노래가 된, 박순경이 미스공언니에게 준 테잎에 있던 자신의 노래.
미스공언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박순경의 표정이 굳고, 엄마와 아빠는 황당한 노래 가사에 마구 웃으셨다.
그 사이에 동생은 그 노래를 끝까지 불러버렸다. 왜 철이 없으면 눈치도 없는걸까. 동생은 뭔가 대단한걸 해냈다는 듯 한껏 뿌듯해했다. 그 순간 평소에 이해가 안갔던 동생을 패는 애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박순경은 미스공을 데려다주고 가겠다며 함께 집을 나섰다. 자기 순애보를 부주의하게 애들한테 흘려 자기를 웃음거리가 되게 만든 미스공을 생각하며 박순경은 얼마나 속이 쓰렸을 것인가. 철 없는 내 동생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을 오해받게 된 미스공언니는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얼마나 머리속이 복잡했을까.
가는 동안,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내가 아는건 미스공언니는 어딘가로 떠났고, 박순경은 남아 있었으며, 박순경이 다시는 미스공언니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아직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영숙언니와 내가 장을 보러갔을 때의 일이다. 한참 성의 없이 장을 보던 언니는 누군가 회색 옷 입는 남자가 자신을 따라온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회색 옷 입은 남자가 우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설마, 해서 언니와 나는 좁은 시장길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는데 그 남자가 계속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언니는 울상이 되어 길 잃은 아이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어쩐지 또다시 언니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 들어, 곧 미스공언니처럼 헤어질 언닌데 내가 지켜야겠다는 엄청난 사명감에 휩싸여 언니 손을 꼭 잡고 뛰기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조금만 뛰어도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하던 내가 어떻게 그 길을, 그것도 언니보다 앞장서서 달려 엄마가 계신 의상실까지 왔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영숙언니는 그 남자가 예전에 본 남자라며 겁에 질려 엄마손을 꼭 붙들었고, 나도 숨이 턱까지 차 올라 엄마에게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이게 웬 일인가. 그 회색 옷 입은 남자가 여기까지 쫓아온게 아닌가.
영숙언니와 난 기겁을 해서 엄마 뒤로 숨었는데, 그 남자가 엄마에게 경례를 했다.

"방배파출소 ###순경입니다. 박순경님한테 업무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납치미수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그 회색옷의 남자는 3가지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영숙언니의 납치미수사건...은 거짓말이었고,
박순경은 다른 파출소로 발령이 났으며,
경찰의 제복 중엔 회색 옷도 있다.
그 중에 가장 슬픈 건 두 번째 사실이었다.

나는 미스공언니가 박순경아저씨를 좋아한거 같다고, 말해주기엔 너무 어렸고, 박순경과 그렇게 친해지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얼마후, 우리집은 더이상 결단을 미룰 수 없어서 다른 어른들에게 '망했다'는 표현을 듣는 이사를 하게 되었고, 영숙언니는 그 일이 창피해서인지 다른 집으로 가지 않고 그냥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정말 은행잎이 물들 때, 언니는 동생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후로 언니가 계속 시골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언니가 가족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미스공언니나 영숙언니는 아직도 앨범 어느 페이지에 남아 있다. 데이트를 하러 가기 전에 초록색 스웨터와 청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퍼프 소매 원피스를 입고 마당 화단에서 꽃을 한 송이 꺾어들고선 채로. 앨범에는 없지만, 아직도 나와 동생이 우리가 아직도 가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게 되는 그 노래의 주인공 박순경도 그 언저리에 맴돌고 있다.

--------------------------------------------------------------------------------

방배경찰서 강력계 박##반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유년의 어느 시절로 날아간 듯한 여행은 아주 띄엄띄엄 이어지긴 했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얼마  있으면... 취재를 핑계로 그 아저씨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때, 이 노래의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미스공언니와 간밤에 무슨 얘기를 하며 돌아갔는지 물어볼까 말까.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andman
2002.06.03 18:30
확실히 난 이상해...
오늘 컴 앞에 앉기전... 박순경이야기가 왜 안올라오지?
했는 데 .. 올라와 있네요... 집에 가다가 오늘 왜 부추가 먹고 싶지 하면
집에 가면 반찬으로 만들어져 있고...
생각만 하면 다 되는 걸 보니... 내겐 왜 알라딘 램프가 안 오나를 생각해야 겠다
클클... 세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뭘 말하지...

역시 이야기는 기대 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야 재미가 있네요.
전 미스공과 박순경이 결혼했나 하고 생각했는 데....
그리고 빈센트님의 <은행잎>이란 노랠 언젠가 꼬옥 들어 봐야 겠다는..

예나 지금이나 노랠 부르면 누군가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클클.. 저도 그래서 일부러 뽕짝을 부르지요 ㅎㅎㅎㅎ.
누군가 성악 전공하는 사람이 신입 환영회 3차후 노래방에서
그녀의 차례가 되자 분명 가곡을 불러 대겠지 하다가 그녀가 뽕짝을 멋있게 부르자
그녀에게 질문 했답니다... 그러니 그녀가...
일부러 뽕짝을 부른다나 뭐래나...)

각설하고...
이야기가 한 10부 까지 갈줄 알았는 데
6부에서 마무리 지으니 아쉽네요...
박순경은 님을 보면 미스 공이 생각날 것이고...

가끔 쓰는 무명류사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자주 쓰는..)

"추억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과 같은 데...
어둠 속에서 본 한줄기 빛에 그 빛에 흠뻑 젖고 싶은 욕구가 강하지만
막상 그 강렬한 빛을 대하면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그래서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만 아름답다는....

동생을 패는 이유... 라....
어린 마음에 그것을 생각한 노숙함에 감복 감복 드립니다. ^^;

속편 한번 올려요~~~~
revo89
2002.06.04 01:33
좀더 기일게~~만들면 "새의 선물" 같은 괜찮은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많이 기다렸었는데...벌써 마지막이라니....좀 아쉽기도 하구요. ^^
vincent
글쓴이
2002.06.04 04:51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ㅡㅡ;;
이전
48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