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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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니코틴과 카페인과 알코올에 대한 단상

winslet
2002년 06월 07일 16시 07분 53초 1299 1
1998년 어느 날 끄적인 나의 일기는 고 3 야자시간을 버티게 하는 것은 순전히 카페인 하나라고 증언(?)하고 있다..

"...학교 커피 자판기는 하루도 못가 동이 난다..

품절이라고 발광하는 자판기의 붉은 불빛에 우리는 한숨을 내쉬며 외출증과 함께

학교 근처 슈퍼 마켓으로 까지 커피를 충족하러 나간다..

교실 한 구석 쓰레기통은 커피액으로 범벅이 된 종이컵과 빈 캔이

마약 중독자의 주사 바늘처럼 수북히 쌓여있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 쉴새 없이 넘어가는 책장 소리와 함께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난다..."


사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변한 것은 없다..

나의 하루는 뜨거운 물에 잠시 담궜다가 찬 물에 다시 불린 녹차 한 컵과

알싸한 박하향에 저 니코틴일 것이라는 위안을 주는 말보로 멘솔 한까치로 시작된다..

작업실 사람들과 모여 3000원짜리 가정식 백반으로 점심을 떼우고 난 오후에는

만성피로가 낳은 나른한 낮잠을 깨기 위해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 한 잔을 꾸역꾸역 마신다..


그렇게 나른한 오후의 잠을 깨워 기나긴 시나리오 회의가 끝나 저녁이 되면

감독님과 조감독들과 함께 작업실 근처 '코너집' 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국밥집에서

식사인지 안주인지 모를 국밥과 함께 쇠주를 마신다..


니코틴. 카페인. 알코올.

나의 하루는 이 놈들 없이는 설명이 안되는 셈이다..

아니,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 뿐만 아니라 이 시대와 이 현재를 살아가는

성인들의 하루는, 한달은, 일년은 그렇게 니코틴과 카페인과 알코올로 점철되어 있다..


사드가 그랬던가.. 인간의 행동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상호 발현된 것이라고..

인간이 니코틴과 카페인과 알코올이 몸에 백해 무익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것들로 자신의 하루하루와 삶을 점철시키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그토록 끊임없이 괴롭히고 싶어하는 가학성과 피가학성의 심정이

혼재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망상이 될까..


난 오늘도,

우리는 오늘도,

끊임없이 니코틴으로 아침을 시작하여 카페인으로 오후를 견디고 알콜로 밤을 달랜다..



아..건전하게 건강하게 살고프당..ㅠㅠ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marlowe71
2002.06.08 04:10
저들 세 가지는... 몸에는 안 좋겠지만 정신에는 좋(을 수도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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