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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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안경 쓴 사람의 마지막 순간.

sadsong sadsong
2003년 05월 22일 04시 32분 51초 1128 5 1
저는 지금 막, 맑은 정신을 찾아보려고 세수를 하고 왔습니다.
그 이야기.

안경을 벗고 거울을 봤습니다. 안경을 벗었으니 좀 뿌옇죠.
이때, 말도 안되게 갑자기 드는 생각이,

시력이 많이 나빠 안경 없이 생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죽음을 눈앞에 둔, 가만히 누워 주변 사물이나 사람들을 보고 있을,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극단이다 싶으면 하루 이틀정도 앞둔 날로 할까요.

모든게 희미하게 보일 그 때에(아마, 안경을 써도),
그 사람은 안경을 찾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그 마지막 순간에.

그렇잖아도 눈 나쁜 사람이,
안경까지 안쓰고 뿌옇게 죽어가면 너무 슬프겠다 싶다가,
안경 찾아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게 어쩌면 더 슬픈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굉장히 빠르게,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깨끗이 헹군다음,
물기를 닦고,
바로 다시 안경을 썼습니다.


이제는,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저 어둠속 냉장고까지 가면,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로,
손가락만한 바퀴벌레를 만나게 될 것 같아,
식탁위에 놓여져있던,
미지근하고 맛없는 물을,
그냥 조금만 마시고 왔습니다.


sadsong / 4444 / ㅈㅎ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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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다 슬프니,
눈나빠 안경 쓴 사람들은,
어쨋든 마지막이 참 불쌍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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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xeva
2003.05.22 08:06
슬플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저같으면 찾을꺼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보고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봐야할듯해서..^^;; 옆에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ryoranki
2003.05.22 15:41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느순간에는 이 성경구절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세상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도서 1장2절.
jasujung
2003.05.25 11:01
연부인은 경문 사른 재를 종이에 싸서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리며 나보고 "아버지"하고 불러 드리라고 재촉하였다. "아버지는 이제 숨을 거두실 거다. 어서!"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소릴 내서 불렀다.
"더 크게, 어서." "아버지! 아버지!"
평온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이 약간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아 어서 또, 빨리!" 나는 "아버지!"또 계속해서 불렀다. 최후의 숨을 거두실때까지.
지금도 오히려 그때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릴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의식이 있어 내가 꼬집는 줄이나 아셨더라면 '나도 마지막 불효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해 본다.
-피천득 '그 날' 중-
Profile
hal9000
2003.06.03 01:30
'뭐 하고싶은데로 하고 되고 싶은데로 다 되면.. 인생이 어디 재미있겄수?' 라고 누가 그랬었는데...
왕산악이 그랬던가... 우륵이었나?
jasujung
2003.06.08 05:23
어케든 후회스런 인생이겠져......돌고도는..결국은 똑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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