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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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우산을 사다...

hifive hifive
2006년 07월 27일 06시 20분 40초 1517 1
아직 장마철도 아니고 비 올 기색이라곤 애기 콧구멍에 코딱지만큼도 없는데...
남들 활보하고 다니는 한낮엔 끈적거리는 침대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창을 덮은 커텐이 푸르딩딩한 색기를 부릴때야 비로소 머리맡에 휴대용시계단말기(?)를 보고서야 부비적 거린다.
'일곱시 였나?'
'그게 무에 소용이람?'
'시간은 관념을 틀에 구겨넣고 싶은 누군가의 숫자 놀이일거야..'
침대에서 다섯 걸음하고 하나 더 (!?)였나(?) 음식물을 식혀주고 그것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게 해주는 상자.
문을 열면 후줄근하게 감기는 방안의 공기를 확인케하는 냉기가 전해온다.
가만히 그리고 머리통을 들이 밀어 넣는다. 냉기가 귓볼과 콧끝을 식혀주고 잠을 깨줄것이다....제발!
신성한 의식의 시작이다.
유통기한이 3-4일은 넉넉히 지난 우유를 대접에 반쯤 따르고 간밤에 뽑아놓고 식혀버린 탄내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저 섞는다.
두손 가지런히 대접을 들고는 임금이 내린 사약 마냥 감사히 그리고 조금은 억울하게 마셔낸다. 원샷!
지금 그것들은 식도를 따라 쿨럭거리며 위장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깨어나라! 어여~!
뒤늦게 기지게도 펴보고 생달걀을 양손에 들고는 아주 가볍게 배꼽 주위를 두드린다.
이 얼마나 거룩한 행위인가!
내 안의 노폐물들에게 그들의 천적이거나 친구인 미생물들을 보내주므로써 체세포 분열을 하지 말것을 종용하며
밝은 세상으로 나오라고 손짓한다. 그 손짓에 화답하듯 분명 선동해줄 노폐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잠시간 나는 딴청을 해주는 센스를 발휘해준다.

노트북을 켜고 TV를 켜고 메일을 열어보고 채널을 돌려보고...

내 손짓에 신호를 보낸다. 지금은 아니다. 진정한 손맛을 보려면 조금 더 딴청을 부려야하는 호기가 필요하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서 정성껏 잇몸과 치아를 마사지하듯... 그리고 숫자 100까지 심호흡...
노폐물과 미생물의 만남으로 공간이 시끄러워진다.
면접 전의 초조한 자세로 약간은 구부정 .뒷굼치를 들어주고 숨을 들이쉬며 한번에 아랫배에 힘을!!!
유후~! 짧고 굵게 게다가 부드럽게!!!! 누군가의 생활신조 일지도...
휴지가 없는 화장실을 누군가가 찾아 앉을 때면 난감하다. 하지만 그들의 불편을 내 지갑이 감수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샤워기를 틀어 머리에서부터 물을 맞으며 샴푸통뒤의 사용 설명서와 성분까지 중얼 거린다.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방안을 헤집는다. 이미 흥건히 떨어진 물기에 미끄러져 벌러덩하고 자빠져 운좋게 뼈라도 부러지면 보험 설계사에게 전화해야지. 자해공갈단 보다는 자해로우니...

침대를 정리하고 옷장을 열어 입을 옷을 꺼내고 거울속에서 무어라 떠드는 TV속의 앵커를 본다.
그 앵커보다 낮선 내 모습엔 긴 한숨 뿐이다.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눈가의 기미.사과보다 먼저 떨어질것 같은 흐르다 배꼽과 곧 재회 할것 같은 가슴과 배꼽을 깊숙히 감춰주는 덩어리들... 이것들은 왜 내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리도 빤빤하게 거울속에 있는건지..
그래도 사랑한다! 유일하게 내 곁에서 온갖 구박속에도 있어주니...
이것들을 넉넉하게 감싸서 숨겨줄 반반한 옷들도 아닌데 구겨 넣는다.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벌렁 누워 청바지 안에 낑겨 넣는다. 젖은 머리칼은 타월로 꾹꾹!

사실 이렇다하게 쉬는 날에도 갈 곳도 없다.
양배추.오이.곤약. 그리고... 뭔가가 필요한데..
걸어서 삼십분. 버스를 타면 10여분이면 갈 수 있는 활인매장을 간다.

반짝반짝 반짝이는 눈 빛...
많다. 살것도 사고 싶은 것도...머릿 속엔 양배추.오이.곤약...그리고 무언가...
손들이 자꾸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가 수레에 담았다가 꺼냈다가..
결국엔 양배추.오이.곤약.가지.베이컨.스파게티 국수. 그리고 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재고정리. 1900원...
창고에 있던 물건들... 재고정리...매대 진열상품... 난 이중 뭘까?
"그 잘난것 하라고 대학 가라고 뒷치닥거리 한 줄 아니? 그 만큼 해줬으면 밥벌이는 해야지?
나쁜 년! 동네 챙피해서 너 유학갔다고 했으니 밥줄이라도 생기면 집구석 왕래하고 아니면 상판때기 내밀지도 마라!
아이고 나쁜년! 저 좋은게 에미 속 문들어지게 하는 줄도 모르고..."
"밥벌일 못하면 값 나갈때 시집이라도 가던지? 뭐하는게 있어 버텨! 버티길..."
"네 동생 혼삿날 잡았다. 도대체 넌 뭐하는 물건이야? 아이고 나쁜 년..."
엄마...엄마에게도 땡처리 할때가 오기를...

동대문 시장의 노점에서나 볼 것같은 수북히 쌓아놓은 물건들.
우산... 양산인가?
하늘색과 연두색... 바랜.제 빛깔을 놓친. 제 값도 못받는 우산들...
펼쳐본다.
후텁한 공기속의 서울 하늘같아! 비를 떨굴것 같은데 속은거야.먼지와 중금속과 매연과 수증기를 교묘히 뭉쳐놓은 죽은 붕어 눈알속의 맛간 회색같은 하늘색...
봄볕을 닮았어.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려 했는데. 담장 한켠에 볕이 채 들지 않아 녹지 않은 흙투성이 얼음처럼 누런 얼룩.창고를 제집 드나들듯 뛰어디는 쥐오줌일거야. 그래도 연두가 좋다.
장마철엔 봄볕같은 연두색을 보며 쥐오줌이 지워지길 바라고...
뜨거운 해가 지글거리며 소독이라도 해주길 바라자.
'이제 넌 재고가 아니고 내 물건이야'

계산대 콘베이어에 수레에 담았던 물건을 꺼내 놓는다.
9940원.. 봉투를 사면 9990원...
만원짜리 한장이 지갑을 떠나 낳은 것들과... 10원...
다른것들은 먹고 배설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산과 10원...이것들은 내가 잃어버리거나 버리지 않는 한 내곁에 있을거다. 구박도 안하고...

흙탕물이 토악질하며 한강다리를 위협할 비가 왔을때. 난 봄볕나는 우산을 집에 두었다.
비가 오는 내내 창문을 열어 한쪽 팔을 내밀고 샤워기같이 쏟아지는 비를 세고 있었으니까.
나쁜 놈 한방울.
나쁜 년 한방울.
나쁜 놈 무더기.
나쁜 년 무더기.

나쁜 년 한 양동이...
팔이 떨어져 나갈것 같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았다. 왔었는데 몰랐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봄볕나는 우산은 양산이 되겠지...
허리를 잘라 고기밥이 된줄 알았던 장마가 끝이 아니란다.
두텁고 낮게 깔린 구름속에 얼마나 많은 비들이 담겨 있을까? 그래도 빈손으로 외출한다.
우산을 넣어 가기엔 가방이 작고 손에 들기엔 잃어버리기 십상이게 귀찮고...
외출이 지루해질 무렵..길바닥이 촉촉히 젖는다.
빌어먹을!
자정을 넘길 무렵. 제법 태풍 콧김을 쏘인 모양새를 갖춘 비가 택시를 잡게 한다.
골목까지 꾸역 타고 들어가서는 엘리베어터를 무시하고 뛴다.
숨이 턱까지 차서 현관을 열고 우산을 찾는다.
신발을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가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를 꿰고 운동화를 신는다.

빗방울을 받아내는 우산이 경쾌하게 튕긴다.
투드득..툭.툭.투드득...
걸어서 30분의 할인매장..
우산 밖으로 팔을 내밀어 비를 맞는다.
나쁜 놈 한방울..
나쁜 년 한방울..
시원하다! 빗방울도 바람도.. 초저녁 우줄근하게 등줄기에서 땀을 짜내던 텁텁함이 없다.
팔에 떨어지는 방울 방울의 촉감이 고양이 혓바닥같다.
나쁜 년 한방울... 두방울 .. 또 두방울...
그렇게 다 씻겨 가길...
'비상금으로 챙겨 두었던 적금통장이라도 엄마에게 건네야할까?'
'나쁜년 보단 이쁜 딸 되고 싶은데...'

비를 머금은 봄볕나는 우산엔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무도 재고정리 인줄 모르거다. 할인매장을 갖고 들어가도 말이지...

이제 어젯 저녁이 되어버린 지금..
그 저녁에도 난 봄볕나는 우산을 챙겨 나갔다.
하지만. 우산을 펴기엔 부족한 빗방울이 툭툭 건든다.
나쁜년이 사라진걸까?

집으로 들어와 침대의 유혹을 받을 때 즈음..빗소리가 또각또깍 힐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모니터 앞에 앉아 주절거리는 동안..
아침이 밝아 버렸다...

침대가 날 섹시하게 유혹한다....

'
종이시계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lobery
2006.07.27 15:27
곧... 밥벌이하는 이쁜 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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