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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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동그라미 그리기

ty6646
2008년 07월 12일 00시 49분 56초 2054 1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위해 커피숍에 갔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커피한잔 앞에 두고 대가리박고 끄적거렸다.
한참후 대가리 들어보니 옆자리에 여자가 하나 앉아있다.
고도의 테크닉으로 고개는 안돌리고 눈깔만을 180도 회전시켜 힐끗 보았는데....
오우 베리굿...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녀와의 거리는 어림 80센치...
어깨위를 찰랑거리는 약간 물들인 머리색,
한입에 앙 캐물어 버리고 싶은 귀엽고 예쁜 얼굴,
윤기가 잘잘 흐르며 거머스럼하게 잘 구워진 듯한 가슴 언저리살....
짧은 스커트 아래로 미끄러질 듯이, 터질듯이 탱탱한 허벅지...
아... 내 것도 탱탱해 질려고 하는데...


도무지 집중이 안된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되고 머리속은 비어간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방귀를 뀌기도 어렵다.
표정이나 옷차림, 머리모양에도 신경쓰이게 된다.


스레빠와 10년된 츄리닝, 한달, 혹은 두달에 한번하는 면도로 인한 얼굴상태가 평소의 내 모습이다.
양복이라 불리는 종류의 옷과 구두라고 불리는 종류의 신발이 사라진지 10년도 넘었고,
머리 빗으라고 쓰는 빗도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구두와 빗을 써본지가 언제였던가...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이게 되고
관심없는 척, 여자엔 도통한 척 하는 게 무지무지무지 어려웠다.
목이 뻐근해 와서 심호흡을 위해 어깨도 펴고 목도 돌려본다.
힐끗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내 눈은 그녀의 가슴과 다리를 체크한다^^


노트위에 써가던 시나리오의 전개가 전혀 알수없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대신 노트엔 장볼 메뉴가 나열되거나 시나리오의 중간중간에 의미없는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너한텐 눈꼽만큼도 관심없다라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대범하고 신사이며 도통한 모습에 감명받아 내게 눈길한번 줄지도 모를 것이란 착각속에 빠져
더욱더 열심히 장보기메뉴를 쓰고 동그라미를 그려나간다. 줄도 쳐가며.....(-_-)




『쟤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선배든, 후배든, 아니면 이웃집 사람이든,
뭐든 그녀와 약간의 연결고리라도 걸쳐진다면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볼텐데.
내가 쟤를 어떤 식으로라도 약간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 저렇게 혼자 두진 않을텐데.... 다들 눈을 어디에다 두고 사는거야』



내 눈에 그녀는 외로워보이기까지 했다.
때론 나보다 더 뭔가를 열심히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뭐야?, 공부하나, 아니면... 혹시 쟤도 나와 같은...동. 그. 라. 미. 그리기...?
혹시 내게 마음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이 일생일대의 챤스를 날려보내고 있는거 아닐까?』





그럴리가 없쟎은가.




그 자리를 비켜나면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숍안의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속삭임이 커피향에 묻어 내 심란한 마음을 가볍게 흔들어놓는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소한 재잘거림이 얼마나 부러운가,
마주하고 향을 나누며 달콤한 커피맛을 나누는 저녁시간이 얼마나 부러운가,
서로의 눈길속에 마주앉은 사람을 담아주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가,


일어서서 보니 그녀의 머리꼭대가와 함께 보다 더 많이 열린 가슴살이 눈에 화아아악 들어온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뭘하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 마음은 이미 그녀에게 사로잡혀 버려서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듯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외의 그 어떤 다른 여자도 관심밖의 여자가 되어버린다.


그 짧은 순간에 난 사랑에 빠졌다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헤어지고,
이제는 혼자서 쓸쓸히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다.
괜히 슬퍼지고 우울해진다. 창너머의 네온싸인이 반짝이면 반짝일수록 더욱 더 우울하고 외로워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다음에 한번 더 만나게 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어. 그땐 말걸꺼야






뒤도 안돌아보고 성큼 걸어서 나가는데 뒤에서 여자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날 부른건가? 누가? 왜? 설마... 하며 고개를 반쯤 뒤로 돌려보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거기엔, 거기엔, 거기엔


어깨위를 찰랑거리는 약간 물들인 머리색,
한입에 앙 캐물어 버리고 싶은 귀엽고 예쁜 얼굴,
윤기가 잘잘 흐르며 거머스럼하게 잘 구워진 듯한 가슴 언저리살....
짧은 스커트 아래로 미끄러질 듯이, 터질듯이 탱탱한 허벅지... 가 내 눈앞에 서서 날 바라보며 날 부르고 있다.





입이 안떨어졌다. 침이 한움큼 넘어가는 바람에 목구멍이 막혀서 목이 메여버려서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멋있게 쳐다만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저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집으로 달려가는 자전거 위에서 속으로 몇번이나 되씹으며
생각하고 상상하고 흐믓해하며 즐거워하다가 넘쳐흐르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지나온 모든 길위에 반쯤 상한 듯한 미소를 풀풀 흘렸다.




저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저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저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그녀가 집어준 내 볼펜이 그렇게 착하게 보이다니....
볼펜을 바라보며 난 다시한번 다짐한다.





만약에 다시한번 그녀를 만나게 되면 그땐 진짜루 말걸꺼야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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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man
2008.07.15 02:21
볼펜을 유전자가 떨어 뜨렸나 봅니다.

아깝네요.

다음이란 언제 존재할지 모르지만...
다음이 만약 오면 인연이겠지요...

전 그렇게 다음에 라고 하며
3번 이나 우연찮게 만난 사람이 있었는 데...

또 만나려나 하고 시험 해봤더니
그게 다였습니다.

다가온 운명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가버린 다는...

운명은 절대 시험 해보는 게 아니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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